배추가 돌아왔다.

*다산북스, 2006. 방동규

 대한민국. 하고 많은 인물 중에 자칭타칭통칭 3대 구라가 있다. 소설구라 황석영. 통일, 민족구라 백기완 또 한 분은 포스팅의 주제인 배추가 돌아왔다의 저자 방동규다. 그의 삶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구라"로 가득하다. 고로 삶 자체가 곧 '구라'인 구태여 니르고저 한다면 "인생구라"라 할만하다.

 

 이쯤. 왜 저토록 이름만 들어도 훌륭해 보이는 황석영, 백기완에게 왜 하필 좋은 별명 다 놔두고 구라가 붙었을까 의심해 볼 법도 하다. 물론 그런 법이 없다 하시는 분들은 스크롤의 압박 느끼지 마시고 조용히 글을 내리시면 되겠다. 구라라는 말이 숨은 말이고, 비속어로 쓰이고는 있지만 결코 나쁜 말만은 아니다. 우리 삶 사이에서 말잘하는 이를 일컬어 구라라 하는 예를 쉬이 찾아 볼 수있다. 왜 연예인 중에도 있지 않은가. 재치있는 입담과 솔직한 언변으로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인 김구라. 삶을 통해 얻어진 엑기스 같은 입담으로 청취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튼, 저 세 분들에게 붙여진 '구라'라는 별명으로 그것도 꼭 셋이 엮어서 3대 구라로 통하는 이유가 무얼까.

 

 우선. 소설구라 황석영.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문학활동으로만 먹고사는 유일한 현업작가가 바로 그다. 누구처럼 모 당의 공천심사위원으로 발탁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작가 이기를 포기한 작자들과는 한참 격이 다른 분이지. 물론 내가 이녘(황석영)의 정치활동 등에도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석영은 뛰어난 문필가요. 실천적 지성임에는 틀림이 없기에 문학동네 안팎의 사람들이 그의 활발한 활동에 한 표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로 통일구라 백기완. 그는 참칭 뛰어난 풍류가를 자처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보다 문어 처럼 식성이 좋은 이가 없다. 무수히 입만 벌리면 통일이요, 민족이요. 자유요, 해방이요. 를 외쳐대는 이들과는 격이 다른 분이지. 내가 그의 삶에 대해 한 마디도 중언부언.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 인생구라 방동규는 어떤가. 그는 실제 본명인 방동규 보다 배추라는 이름이 어울리고 또 그렇게 불러야 옳은 사람이다. 왜? 현역 배추장사여서 인가?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배추가 돌아왔다는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그의 수기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히 낭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무어 볼 게 있나 싶어서 책까지 내놓았는고 하니. 그야말로 격랑의 낭인이 아닌가. 떠돌아 야인이 아니라. 격랑 속에 덤벼들어 낭인이며 영원한 대한민국의 배추인 방동규. 그가 돌아온 것이다.

 

 세인들은 증거한다. 그는 시라소니(이성순-주먹 1세대.) 이후 최고의 주먹이면서도 어느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정치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과 두루 친했으며 성정이 솔직한 사람이다. 한국전쟁 당시 배추장사, 돼지고기 장사 등으로 연명하기도 하고 파독광부로서도 생활하였지만 자기 삶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돈을 우선시 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그리고 끝내 나의 파란만장한 삶은 완성되어 가고 있고 그는 그것에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는 한마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협객이요,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인이다.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일념하에 강원도 산골오지에 노느메기 공동체를 개간하고 노동과 땀으로 일구어낸 그의 삶 까지 대해 보노라면 가슴이 쨔안해질 지경이다. 그는 현재 경복궁문화재관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니 관심있는 분들은 응당 찾아뵈어야 할 것이다. 아직 죽지 않은 마지막 자유인을 말이다. 또 마땅히 한국의 조르바 방배추가 아니라. 그리스의 방배추인 조르바의 삶과도 은유해 본다면 이 돈 키호테 같은 삶을 관조해봐야 할 것이리라..

by 白首狂夫 | 2007/01/14 10:40 | 트랙백(1) | 덧글(2)
오구를 보고…
영화 오구는 뭔가 특이한 '감'의 영화이다. 특별히 연극적인 것, 영화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10여년 째 롱런하고 있는 연극 오구의 영화화부터 연극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팬들은 연극적인 이 영화가 어딘가 못마땅했을 것이고 연극팬들은 영화가 된 이 드라마를 소화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는 흥행참패.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진짜" 관객을 끌었고 그들에게 사랑받았다.  

 

 언제 개봉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영화를 필자는 세번이나 보았다. 물론 개봉관에서도 그 흔한 극장에서도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모두 고마운 케이블 영화 채널 덕분이다. 오늘은 이 글을 쓰기 위해 특별히 DVD를 구해왔다. 그런데 막상 쓸말이 없다.

 

 영화평이랄지.. 아니면 영화 오구의 특성에 대해서 나름 지껄이기 위해 노트를 준비하고 펜을 준비했지만 정말 쓸말이 없었다. 제목은 시답잖지만 "영화 '오구'를 통해 본 타계이행과 한국적 무속의 특질과 문제제기"로 삼았다. 하지만 다들 알겠지만 (필자가) 아는 게 없잖은가? 어쩌면 아는 게 없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괜히 아는 것도 없이 주절, 나불 거렸다가 패대기 당할지도 모르기에 조심성 있게 글을 올려본다.

 

 영화의 배경은 시대상을 알 수 없는 가까운 시간대 내의 시골 마을이다. 정확히는 경남 밀양이다. 아마 연극도 같은 배경이리라 짐작해 본다. 시작은 물 속에서 세 명의 남자가 걸어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로 "오구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의 사자로 죽는 이를 데려가기 위해 급파된 세 사내들이다. 이들은 "구름"이다. 왜냐? 인간들이 그들을 "구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사자들에게 인간세계는 곳 '난리굿판'으로 흥미로운 것으로 가득차있다. 남성의 욕망 중 그 비중이 가장 큰 거대한 음경이 장난스럽게 흔들리고 알몸으로 시내를 떠돈다. 필연인듯도 하지만 우연인듯이 말이다.

 

 인간세계는 인간이 아닌 것이 보기에도 흥미롭지만 인간들 본연에게도 흥미로운 것이리라.

 

 영화의 제목인 『오구』는 실제로 전승되는 경상도 지방의 굿이다. 그것은 바로 저승의 명왕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하는 만신풀이가 아니라 모든 살아서 죽어가는 것들을 위한 위로의 향연으로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을 앞둔 할매를 위로하고 그 할매를 잃을 자식과 그 아내와 또한 그 손녀를 위로한다. 우리네 삶의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禮라는 것이 있다. 중국 유가에서 발달한 禮道가 아니라 우리 전통의 예악이다. 그것이 바로 굿이다. 만신을 불러내는 박수와 당골의 몸짓과 신명나는 북, 장구 등의 풍장. 그리고 그 한판 신명나는 한 판 굿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비로소 신과 만나게 된다. 1:1로 말이다. 모든 제의로 말미암아 흉토는 옥토가 되고 생명을 잃은 모든 것이 생명을 되찾는다. 바로 그런 행위예술적인 제의의 측면으로 규정짓지 않아도 굿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를 갖게 한다.

 

 죽음과 생명에 대한 일련의 잔치이다. 이청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하여 화제가 된 『축제』와 박갑수의 영화 『학생부군신위』를 참조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 영화들 속에서의 상장례는 축제였다. 영화와 소설들의 모티프인 우리 조상님네에게 역시 상장례는 축제였다. 잔치다. 사람이 돌아가서 슬프기만 한가? 새로운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망자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이성의 감옥 속에서 서로를 옭아매고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잔치는 굿이다. 흔히들 서양에서는 디오니소스적 제의성에 주목하고 그들의 원시적 카니발에 주목한다. 하지만 우리민중이 가져야 할 것은 연희의 신 디오니소스의 술병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노트에서 야생의 향연이라 노래한 해방의 문명이 바로 죽음과 탄생의 제의 안에 숨어있고, 우리는 영화 오구를 통해 그 내밀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라. 그리고 춤추라. 혼란스럽지 않은 것처럼.

 

 영화 『오구』야만의 삶이라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문명의 경이 앞에 놀라움을 금치 않으며 이만 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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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白首狂夫 | 2006/12/11 19:32 | 짧은 이야기 짧은 생각 | 트랙백 | 덧글(0)
다산치학 10綱 50目 200訣

다산치학 10綱 50目 200訣

1강 단계별로 학습하라

 1목 如剝蔥皮法(여박총피법)

 →파 껍질을 벗겨내듯 문제를 드러내라

  껍질을 벗겨내라\문제를 도출하라\한 우물을 깊이 파라\뒤섞어 혼동 말라

 2목 觸類旁通法(촉류방통법)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계통 있게 정리하라\미루어 알게 하라\체계를 유지하라\대답을 찾아가라

 3목 築基堅礎法(축기견초법)

 →기초를 확립하고 바탕을 다져라

  기초를 닦아라\신기함을 추구 말라\바탕을 갖추어라\역경을 딛고 서라

 4목 當求捷徑法(당구첩경법)

 →길을 두고 미로 가랴 지름길을 찾아가라

  요령 있게 탐구하라\바른 길을 따라가라\차례를 잊지 말라\번지수를 파악하라

 5목 綜覈爬櫛法(종핵파즐법)

 →종합하려 분석하고 꼼꼼히 정리하라

  꼼꼼히 따져보라\맥락을 연결하라\종합하고 정리하라\이치를 깃들여라

 

2강 정보를 조직하라

 6목 先定門目法 (선정문목법)

 →목차를 세우고 체재를 선정하라

  얼개를 구성하라\정보를 장악하라\범례대로 초록하라\규모를 드러내라

 7목 變例創新法 (변례참신법)

 →전례를 참고하여 새것을 만들어라

  새롭게 만들어라\발상을 전환하라\성과를 점검하라\방법만 배워오라

 8목 取善論斷法(취선논단법)

 →좋은 것을 가려뽑아 남김없이 검토하라

  가치를 논단하라\폭넓게 섭렵하라\문제를 파악하라\명석하게 판단하라

 9목 擧一反三法(거일반삼법)

 →부분을 들어서 전체를 장악하라

  정곡을 찔러라\오성을 활짝 열라\정리를 습관화하라\식견을 툭 틔워라

 10목 彙分類聚法(휘분류취법)

 →모아서 나누고 분류하여 모아라

  가치를 규정하라\경험을 누적하라\관찰하고 기록하라\갈래잡아 정돈하라

 

3강 메모하고 따져보라

 11목 鈔書權衡法(초서권형법)

 →읽은 것을 초록하여 가늠하고 따져보라

  저울질을 먼저하라\네트워크를 형성하라\일관성을 확보하라\주견을 확립하라

 12목 隨思箚錄法(수사차록법)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箚子)하라

  생각을 붙들어라\의문을 천착하라\깨달음을 기록하라\손을 믿어라

 13목 反覆參訂法(반복참정법)

 →되풀이해 검토하고 따져서 점검하라

  오류를 파악하라\가설을 입증하라\명쾌하게 고증하라\맥락으로 수렴하라

 14목 潛心玩索法(잠심완색법)

 →생각을 정돈하여 끊임없이 살펴보러

  몰두하고 침잠하라\문제에 몰입하라\쉼없이 탁마하라\석연하게 깨우쳐라

 15목 知機惴摩法(지미췌마법)

 →기미를 분별하고 미루어 헤아려라

  공부와 삶을 일치시켜라\허실을 간파하라\초점을 파악하라\행간을 읽어라

 

 4강 토론하고 논쟁하라

  16목 質定收斂法(질정수렴법)

  →질문하고 대답하며 논의를 수렴하라

   중간에 중단 말라\따지고 추궁하라\토론하고 논란하라\가차없이 비판하라

  17목 大夫相訟法(대부상송법)

  →끝까지 논란하여 시비를 판별하라

   쉽게 물러서지 말라\상대를 납득시켜라\쟁점을 입체화하라\문제점을 드러내라

  18목 提撕警發法(제시경발법)

  →생각을 일깨워서 각성을 유도하라

   흘려듣지 말라\깨달음을 공유하라\스스로 깨닫게 하라\의혹을 제거하라

  19목 切偲磨琢法(절시탁마법)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라

   비판할 뿐 칭찬 말라\오류를 인정하라\권위에서 벗어나라\양보 없이 논쟁하라

  20목 無慾不信法(무욕불신법)

  →근거에 바탕하여 논거를 확립하라

   근거에 입각하라\비방을 자제하라\버릴 것은 버려라\증거를 제시하라

 

 5강 설득력을 강화하라

  21목 彼此比對法(피차비대법)

  →유용한 정보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라

   자료를 점검하라\명백하게 따져보라\논리를 입증하라\오류를 밝혀내라

  22목 屬詞比事法(속사비사법)

  →갈래를 나눠서 논의를 전개하라

   갈래별로 연결하라\항목에 따라 배열하라\요점을 제시하라\핵심을 강화하라

  23목 公心公眼法(공심공안법)

  →선입견을 배제하고 주장을 펼쳐라

   객관에 기초하라\마음으로 납득하라\냉철하가 판단하라\허심으로 주장하라

  24목 層遞判析法(층체판석법)

  →단계별로 차곡차곡 판단하고 분석하라

   쟁점을 드러내라\명료하게 분석하라\중심을 잃지 말라\반론을 격파하라

  25목 本意本領法(본의본령법)

  →핵심을 건드려 전체를 움직여라

   방향을 잊지 말라\식견을 자랑 말라\주제에 집중하라\초점을 잃지 말라

 

6강 적용하고 실천하라

  26목 講究實用法(강구실용법)

  →쓸모를 따지고 실용에 바탕하라

    실용과 연계하라\갈래를 구분하라\본령을 망각 말라\남을 감염시켜라

  27목 採適明理法(채적명리법)

  →실제에 적용하여 의미를 밝혀라

    관념을 거부하라\로드맵을 제시하라\견문을 확대하라\상황을 장악하라

  28목 參酌得髓法(참작득수법)

  →자료를 참작하여 핵심을 뽑아내라

    쓸모 있게 배치하라\새것을 창출하라\변화를 추구하라\실용을 강화하라

  29목 得當移取法(득당이취법)

  →좋은 것은 가리잖고 취해와서 배워라

    장점을 흡수하라\향상을 도모하라\끊임없이 변화하라\가능성을 고려하라

  30목 修正潤色法(수정윤색법)

  →단계별로 다듬어 최선을 이룩하라

    끊임없이 수정하라\거친 것을 다듬어라\첨삭하고 가공하라\대안을 제시하라

 

7강 권위를 딛고 서라

  31목 一反至道法(일반지도법)

  →발상을 뒤집어 깨달음에 도달하라

    상식의 허를 찔러라\뒤집어 생각하라\상황에 적용하라\타성을 걷어내라

  32목 不抛堅拔法(불포견발법)

  →권위를 극복하여 주체를 확립하라

    힘있게 주장하라\비난을 감수하라\성심을 다하라\타협하지 말라

  33목 篤厚嚴正法(독후엄정법)

  →도탑고도 엄정하게 관점을 정립하라

    그른 길로 가지 말라\시비를 회피 말라\신랄하게 비판하라\관행을 타파하라

  34목 對照辨白法(대조변백법)

  →다른 것에 비추어 시비를 판별하라

    본질을 꿰뚫어라\견주어 판별말라\비교하고 대조하라\객관성을 제고하라

  35목 虛名公平法(허명공평법)

  →속셈 없이 공평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추종을 거부하라\편견을 걷어내라\억탁으로 왜곡 말라\마음을 텅 비워라

 

8강 과정을 단축하라

  36목 分授得宜法(분수득의법)

  →역할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확대하라

   작업을 분해하라\핵심역량을 강화하라\능력을 개발하라\능률을 확대하라

  37목 定課實踐法(정과실천법)

  →목표량을 정해놓고 그대로 실천하라

   목표량을 결정하라\독려하고 경쟁하라\긴장을 놓지 말라\기록으로 보관하라

  38목 庖廩不絶法(포름부절법)

  →생각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단련하라

   비판을 수용하라\보완을 유도하라\인정하되 지적하라\논리를 점검하라

  39목 魚網得鴻法(어망득홍법)

  →동시에 몇 작업 병행하여 진행하라

   정보를 수습하라\새롭게 바라보라\정리하고 정돈하라\시스템을 갖춰라

  40목 條例最重法(조례최중법)

  →조례를 먼저 정해 성격을 규정하라

    성격을 파악하라\차이를 인식하라\전체를 장악하라\세부를 구분하라

 

9강 정취를 깃들여라

  41목 誠意秉心法(성의병심법)

  →정성으로 뜻을 세워 마음을 다잡아라

   부지런히 노력하라\성의로 다잡아라\꾸밈없이 소통하라\보람을 발견하라

  42목 得勝養性法(득승양성법)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성품을 길러라

   미리 깨어 준비하라\탈출을 감행하라\기회를 활용하라\사물을 투시하라

  43목 日常得趣法(일상득취법)

  →나날의 일상 속에 운취를 깃들여라

    선 자리를 사랑하라\의미를 찾아가라\공간을 경영하라\일상을 만끽하라

  44목 談話視機法(담화시기법)

  →한 마디 말에도 깨달음을 드러내라

    중심을 다잡아라\각성을 유도하라\여유를 잊지 말라\이치를 관조하라

  45목 俗中得韻法(속중득운법)

  →속된 일을 하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라

   품위를 유지하라\운치를 깃들여라\서울을 지켜라\맑은 꿈을 간직하라

 

10강 핵심가치를 잊지 말라

  46목 禆民補世法(비민보세법)

  →위국애민 그 마음을 한시도 놓지 말라

   애민의 뜻을 펴라\핵심을 고발하라\감싸안아 보듬어라\분노하고 규탄하라

  47목 艱難不嶊法(간난불최법)

  →좌절과 역경에도 근본을 잊지 말라

   역경에 담대하라\절망을 딛고 서라\위기를 활용하라\근검으로 일어서라

  48목 實事求是法(실사구시법)

  →사실을 추구하고 실용을 지향하라

   실용을 우선하라\합리를 지향하라\실상을 파악하라\쓸모에 맞게 하라

  49목 吾得天助法(오득천조법)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라

   장점을 강화하라\개성을 추구하라\잘하는 일을 하라\독창성을 지녀라

  50목 朝鮮中華法(조선중화법)

  →‘지금 여기’의 가치를 다른 것에 우선하라

   ‘여기’에 바탕하라\우리 것을 중시하라\변화를 긍정하라\주체성을 잃지 말라

 

 한양대 정민 교수가 프린스턴에서 보낸 안식년을 값지게 보내며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의 신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 2006의 내용 중 '다산치학 10綱 50目 200訣'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물론 제가 정리 한 건 아니고 말입니다. ^^

 다산과 연암의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 입니다만, 연암은 높고 크고, 다산은 넓고 깊다고 합니다. 고미숙은 그들의 행방에 대해 연구하면서 라이벌화 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후세의 어설픈 시도로 보일 밖에 없군요. 아직 우리는 호밋자루들고 태산을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겨우 반보 정도 판 것 같습니다.

by 白首狂夫 | 2006/12/06 23:28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0)
하느님, 하나님 호칭에 대하여

I. 한국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의 신에 대한 호칭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이란 말은 쓰지 않고 '하느님'만 사용합니다.

또한 예전에 쓰던 '천주님'이란 말도, 미사 중이나 기도문 중 예외적으로 '성부'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천주 성부'라고 쓰는 경우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한국이슬람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한국 개신교 교회 대부분이 사용하지만 개신교 중에서도 일부 교회는 '하느님'을 쓰기도 합니다.

 

 

II. '하느님'과 '하나님'의 어원 및 그 변천과정

 

1. 어 원 : '하ㄴ.님'

 

사실 '하느님'과 '하나님'은 어원이 같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유일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수사인 '하나'에 '님'이라는 어미를 붙여 만든

단어는 아니며, 역시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훈민정음 자모 28자 중에 현재 쓰지 않는 자모 4자 중 마지막까지

쓰이던 아래아(.)가 사라지기 이전에 쓰던 하늘을 뜻하는

 '하ㄴ.ㄹ'(컴퓨터로 아래아를 표기하지 못해 이렇게 적습니다.)에 '님'이

 결합되고 'ㄹ' 탈락 현상이 일어난 형태의 '하ㄴ.님'이 '하느님'과

'하나님'의 공통적인 조상입니다.

 

즉 우리 민족이 신(하늘)을 일컫는 일반적인 칭호입니다.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라고 표현되는 그리스도교의 신은 창조주, 절대자

, 유일신이며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은 전 인류의 신이므로 모든

언어권에서 해당 언어에서 일반적이고 전통적으로 신을 일컫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영어에서 단순히 신을 일컫는 말인 'God'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2. '하나님'의 기원과 '천주님'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하ㄴ.님'이라고 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등장과 함께 모음 아래아(.)가

사라지면서 이 명칭은 변화를 겪기 시작합니다.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하ㄴ.ㄹ'의 아래아는 모음 'ㅡ'로 대체되어

'하늘'이 되어야 하고 '하ㄴ.님'역시 '하느님'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경우 1907년 평양에서 대대적인 교세의

확장(부흥)이 일어나, 평양식의 발음이 굳어져 아래아가 없어진 후의

표기마저 '하나님'이라고 하게 되었고, 후대에 "한 분 밖에 안 계시니

하나님이다."라는 사후적인 의미부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개역한글판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적고 그 성경이

개신교 교회에 보급되면서 고착화됩니다.

 

다만 천주교는 18세기 말 조선에 한문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들여온

계기로 인해 중국에서 쓰던 '천주님'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3.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 공동번역과 '하느님' 호칭사용의 결정

 

이런 용어상의 이질감 등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해방 후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경을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하고 성경 공동번역

 작업에 착수, 1971년 (신약)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게 됩니다.

 (1977년 구약도 출간됨) 공동번역위원회는 용어 통일을 하면서 그동안

천주교에서 '천주님', 개신교에서 '하나님'이라고 사용하던 신에 대한

호칭을 그 전통과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는 표준어 '하느님'으로

사용하기로 하였고, 그리하여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느님'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4. 공동번역 그 이후, 그리고 현재상황

 

공동번역 성서 출간 이후 천주교에서는 공동번역 성서를 한국교회

전례용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며 '하느님'이란 용어를 줄곧 사용해 왔으나,

 개신교는 교파간의 의견차이가 심해 공동번역 성서를 널리 보급시키지

못하였고, (일부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하느님'이 잘못 전승된 용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이란 용어를 선택한 번역위원회를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사실상 천주교만이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고

개신교는 일제시대부터 써오던 개역한글판 성경을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

공동번역이 의미를 잃게 되자 천주교는 독자적으로 성경 번역작업을

다시하여 2005년에 새 성경을 출간하였습니다.)

 

 

III. 결 어

 

1. 그리하여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란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미사나 기도문 중 관용적으로 굳어진 부분에만

예외적으로 '천주'라는 호칭을 씁니다.

 

2. 개신교에서는 전부는 아니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목사님들

(연세대 교목으로 계시는 한인철 목사 등)은 '하느님'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by 白首狂夫 | 2006/11/25 23:26 | St. Aquinas 신앙생활 | 트랙백 | 덧글(2)
윤후명 - 삼국유사 읽는 호텔.
삼국유사 읽는 호텔

 중견작가 윤 후명의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그의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닌 이를테면 행간으로 보는 고대사 답사기라고 할까?

 『삼국유사 읽는 호텔』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작가인 그가 선택한 일차적 텍스트인 『삼국유사』를 헤집어 볼 필요성이 있겠다. 삼국유사는 고려조 충숙왕 대에 국사로 받들어지던 일연 대사가 편찬한 "설화집"이다. 일단 고전이고 고대사를 다루고 있으니 역사서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테고, 삼국유사의 편찬 저의가 강한 정치성을 띄고 있으니 비중있는 역사서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없지 않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행간으로 읽어내릴 우리는 삼국유사에 담겨진 역사성만 확인하면 된다.

 차설하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역사상 위대한 문헌임에는 틀림이 없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음에 더 무에 중언부언하랴.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말그대로 작중의 "나"가 북한 여행 중, 호텔에서 북한 현지 작가(리상호 교수로 알려짐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가 북한말로 번역한 삼국유사를 읽는 4박 5일간의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가들이 또는 이야기꾼들이 이미 도외시 해버린 삼국유사를 복중에 주어담아 보배로 깎아내고 갈아낼 것은 과감히 갈아내버리고 한 꿰미로 엮어내었다. 그렇다고 참 좋은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참 나쁜 이야기는 완전히 내어진 것도 아니다. "유사(남겨진 이야기 즉,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의 현실성과 현재성을 고찰하며 메마른 시대를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인문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큰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y 白首狂夫 | 2006/11/13 22:44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2)
이현주와 그의 책.
 감리교 내의 퀘이커로 여겨지는 드림교회 대표목회자 이 현주를 아시는지요? 90년대를 관통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은 한 번쯤은 귀에 익은 사람의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이 현주의 책은 여러가지가 있는 선종하신 무위당과 대화체로 엮어낸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삼인)가 대표적이랄만 합니다. 그 외의 번역서 헤셀의 예언자들과 더불어 여러가지 책이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 제가 들고나온 책은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 (전 3권, 삼인, 2006)라는 책입니다. 딱히 종교나 신학에 관심이 없거나 개신교회를 개독교라 지칭하시는 많은 분들이 읽으시고, 개신교회에는 이런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싶어서 들고나왔습니다.

 사실 딴소리 좀 하자면 그 분도 원조 "개독교" 입니다. 그 분이 목회를 그만두신 이유가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라고도 말씀하시지만 사실 감리교단의 경고 받고 목회를 그 분의 표현을 빌자면 "때려 쳤"습니다. 교단의 경고 사항은 금주였고(물론 방종한 생활이라는 모호한 말로 표현했지만..) 그 분의 에큐메니칼적인 발언이 교단의 "높은 분"들의 귀를 거스르게 된 까닭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보수적이지만 그 때는 더 보수적이었으니 말 다했죠... 아마 2006년 현재 술 마셔서 교단에 경고를 받고 목회를 관둔 목사의 기사가 뜨면 네xx니 다x이니 뭐니 난리 날 겁니다. "망할 놈의 개독교 목사 색희" 이러면서.. ㅎㅎㅎ;

 하지만 그 분은 그런 망할, 색희가 아닙니다. 한 때는 존경받는 신학자였고(물론 지금은 존경 못 받고 있다는 얘긴 아닙니다.)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고 민주화에 공헌한 여느 7-8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온 많은 깨인 목회자의 한 사람일 따름입니다.

 그 분이 요즘은 열린예배 정신을 주창하고 일종의 무교회주의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모르실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예배의 한 종류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주일에 예배당에서 높은 의자에 앉아있다가 화려한 제대 앞에서서 강론하고 이른바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성삼위일체의 이름으로 강복하는 형식을 일체 배재한 형태 입니다. 우선 일정한 예배당이 없고 목회자가 없습니다. 그럼 기도와 강론과 강복은 누가하나? 그 예배당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시 주장한 이른바 만인 사제주의의 지류가 이 무교회주의로 이어졌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그니가 요새 하는 활동이 요런 무교회입니다. 일정한 예배당도 없고 자기가 주도하는 형식의 목회도 지양합니다. 한 사람의 섬기는 자로써 예배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순환체제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를 돌면서 배울 점이 많은 분들에게 "한 수"를 청하는 그런 공동체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개정되어나온 그의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는 그의 이런 활동과 맞물려 시의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며 가만히 미련을 떨어봅니다.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처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당신처럼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젊은 식구들. 그리고 개신교를 무턱대고 싫어하시지 마시고 여기 이런 책이라도 읽어보시고 비판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천의 마음을 띄워 봅니다.

 참, 러셀 할배의 종교는 필요한가 혹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와 니체의 안티 크리스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상의 황혼은 열심히 읽기는 읽었지만 공부가 깊지 않아서인지 감명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

+평화^^

by 白首狂夫 | 2006/11/11 11:09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0)
책은 내 마음의 성채를 부수는 도끼이어야 한다.
한달에 책을 몇 권 정도 읽으시나요?

 내심 '국가정책상' "독서의 계절"인 가을 그리고 9-11월 사이에 책에 대해 썰 풀어놓을 장마당이 없나했더니 마침 이글루스에서 이런 걸 하네요.

 많이 읽지는 못합니다. 요새는 드물게 한 권의 책을 늦게 까지 보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독서습관은 누굴 닮았는지 속전속결 전광석화 돈오돈수 수불석권이라..;;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제 맘대로 뜻을 새겨보자면 속전속결 전광석화는 책의 끝맺음이 빠르고 돈오돈수는 불교용어이지만 한 번 읽었으면 생각이 안 날 때까지 다시 보지 않는 거고, 수불석권이란 말 그대로 손에 책 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답니다.

 요새는  『한글세대가 본 논어』 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한 10여일 째 95p를 읽으며 남들이 보면 무척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기에 충분한 속도로 보고 있지요.

 한달에 몇 권 읽는지에 대해서 합산해보지는 못했는데, 구입한 책으로 얘기해보자면 상반기에 73권 하반기에 현재 20권 안팎으로 구입했는데, 읽은 건 80%;;
 저란 인간의 습속이란 그런 거죠. 사놓고 읽지 않고 다 쳐박뒀다가 먼지 쌓이는 걸 보면 흐뭇(?)해 하는 인간형이라는 거...

 올해에 읽은 책 중 건질만한 게 장영희 교수의 책들입니다. 전공이 나름 국문학이라 문학책을 많이 접하려고 하는데, 솔직히 문학이 가장 어렵습디다. 마음으로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지? 장영희 교수의 책은 따뜻하고 감각적이었어요. 그녀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가 특히 제 의표를 찌르더군요. 다만 잘 모르는 책들이 많아서 거닐지는 못하고 헤매었지만... 멋진 책이었어요..

 앞으로는 신화와 우리 고전, 옛 이야기들을 중점으로 볼 생각이고 그 외에 신학, 종교학 서적을 많이  읽어볼 요량입니다. 그럼 이만.;;

쓸 데 없이 말이 길어졌어요..
by 白首狂夫 | 2006/11/05 09:41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0)
그리스도의 세례로 다시 태어납니다.

 교회를 다녔습니다. 진리에 목이 마르더군요. 지혜란 무엇인가.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제가 출석하던 목사님의 사목방향과 가톨릭의 사목방향이 흡사하다는 것 차치하고서라도... 

 교회를 바꿔볼까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다니던 교회. 정말 참구원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재미없는 교횝니다. 평신도의 평균연령대가 50세 안팎이었죠. 이것도 얼라들 하고 청년(저를 포함한 둘) 나이로 좀 차감된 것입니다. 많이 어려웠죠.

 그래서 개신교회 내에서 읍내의 큰 교회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들 대부분 읍내 교회 다녀서요.- 글쎄 그 친한 친구넘덜은 시골 교회 목사님의 농촌 사목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더군요. 가끔와서 보고 따라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으니까. -  아직 어리니까 사람보고 교회 간 것 같습니다. 그저 삼촌이 목회자니까. 아 우리 교회 살림 어려우니까. 가서 노력봉사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이 교회 출석의 8할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교회를 옮겨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또래가 많은 곳에 가서 같이 봉사하고 여러가지 배워서 시골에 있는 소속교회로 가서 베풀어야지 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을 보니, 신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생활적으로는 철이 조금 든 것 같다는 자부도 있었어요.

 일전에 원장수녀님과 면담을 했는데, 그제서야 생각이 듭니다. 사람보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역설이 아닌가, 십자고상에 달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나는 여태 교회 첨탑의 붉은 십자가를 따라다녔다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구원은 그 분과 나의 1:1 이라는 강한 메세지를 머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순명하지 않는 것도 아이러니였던 것 같구요. 제가 그랬으니까.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생애에 구원의 희망을 품고 잠들기 위해 세례 받을까? 하는 어설픈 생각도 품어보았어요. 하지만 생애의 다른 시작점을 위해 현실을 도외시하고 그리스도의 "어려운 뜻"만 추종하는 것도 이성적인 입장에서는 "구식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 않았지요. 하지만 주님은 기다려 주신다는 것. 기다리시지만 당신 받들기를 강요하거나 구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된 것 같습니다.

 요즘 예비자교리 시간이 그 종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별말씀 안 계시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12월 셋째주 정도에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죠. 유다 풍습의 정결례를 업그레이드한 것이죠. 예수님도 요르단강가에서 세례자라는 요한에게서 받으신 일종의 침례(물 속에 깊이 담는 방식)를 받으셨으니까. 그분의 세례는 사적인 생활에서 공적인 생활로 진입하기 위한 입문과정이죠. 우리도 세례의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의식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며 살기 위한 최초의 입문에 불과한 거죠. 세례로 다시 태어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만큼의 시작이라는 신부님 말씀이 가슴 깊이 새겨집니다.

 세례 받았었다의 과거형이 아니라 늙고 죽어 시쳇말로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거듭나고 있다의 현재 진행형 신앙인이 되고자하는 저를 포함한 예비신자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식구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Shalom(평화)

by 白首狂夫 | 2006/11/05 01:21 | St. Aquinas 신앙생활 | 트랙백 | 덧글(0)
서재를 정리해봤습니다.
뭐 알고보면 서재는 늘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 많지도 않은 책들 때문에 한 두어달에 한 번은 청소부터 각 맞추기까지 매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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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白首狂夫 | 2006/10/29 19:55 | 책 읽어주는 남자 | 트랙백 | 덧글(2)
새로 산 컴터.
컴퓨터 바꾸다.



새로 샀다는 그 컴퓨터 사진 입니다.. 후훗,,; 좀 꾸며보았어요^^;
by 白首狂夫 | 2006/10/29 19:27 | Chat of wild goos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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